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쿠마 시게노부 (문단 편집) === 초기 === || [[파일:external/745d1157797a6c165e26170d3a903ea735d3559bacd1f5a4cbfb4d3bee84c3ae.jpg]] || [[사가 현]]([[히젠]]) 출생으로 유년기와 청년기, 장년기를 모두 [[메이지 유신]]으로 지낸 인물. [[무진전쟁]] 당시 사가 번은 도막파에 줄 선 대가로[* 무진전쟁에서 신정부군 편에 섰던 번은 사쓰마, 조슈, 도사, 사가의 네 개의 번으로 그 중 사가 번이 가장 뒤늦게 참전했다.] 사가 번 출신 인물들이 신정부에서 대거 등용되었고 오쿠마도 그 수혜자 중 한 명이다. 경제 쪽으로 유능해서 주로 재무 쪽으로 일하였다. 그는 헌법, 의회, 정당정치를 추구한 인물이었다. 자유민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오쿠마는 이에 동조하여 헌법 제정과 의회 개설을 요청하였고 정당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헌법개진당, 헌법정당을 창당하여 그가 훗날 총리에 올랐을 때 최초로 정당 내각을 출범시킨다. 그는 '''급진적인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여 '''온건한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를 추구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하였고 '''이 싸움에서 이토가 이김으로써 일본은 독일식 모델을 채택하게 된다.''' 1888년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당시 초대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의 요구로 외무대신으로 옮겨갔다. [[치외법권]] 폐지, 관세 자주권 확립을 목표로 하여 협상에 나섰으나 즉시 폐지하는 것은 무리였고 결국 치외법권의 완전한 폐지는 12년 후로 하고, 일부 자유 관세로 우선 전환한 뒤 12년 후에 완전한 관세 자주권을 갖는다는 내용의 개정안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 역시 불평등하다고 일부 일본 국민들은 반발하였고 이듬해 외무성 입구에서 극우 단체 현양사(겐요샤, 玄洋社)의 폭탄 테러를 당해 오른쪽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사퇴하였다. 노년의 오쿠마를 지팡이 짚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게 이 사건 때문이다. 사고 후부터 오쿠마가 착용한 [[의족]]은 현재 와세다 대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